본문 바로가기

Bible

시편119편(5부 잃은 양의 귀환과 최종 고백 (쉰~타우, 153~176절)

하나님 어려움이 닥치거나 힘이들 때 무엇이 문제이겠습니까? 오직 주 여호와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소서. 오직 주님만 의지하게 하소서. 내 여정이 다할때 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겠나이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보고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시고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하게 하소서. 당신의 한 없는 사랑을 구하옵니다. 오늘도 나를 지키소서.

153   나의 고난을 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내가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154   주께서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하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리소서
155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어짐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156   여호와여 주의 긍휼이 많으오니 주의 규례들에 따라 나를 살리소서
157   나를 핍박하는 자들과 나의 대적들이 많으나 나는 주의 증거들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158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
159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랑함을 보옵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살리소서
160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161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162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163   나는 거짓을 미워하며 싫어하고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
164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
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166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167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168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169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170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171   주께서 율례를 내게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172   주의 모든 계명들이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173   내가 주의 법도들을 택하였사오니 주의 손이 항상 나의 도움이 되게 하소서
174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6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119편의 마지막 24절입니다. 4부의 절박한 탄식과 한밤의 부르짖음을 지나, 이제 시인은 어디에 도달했을까요. 놀랍게도 승리의 선언이 아닙니다. 해결된 것도, 고난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무언가가 달라졌습니다. 176절에 걸친 긴 여정 끝에 시인이 도달한 것은 더 높은 곳이 아니라 더 낮은 곳, 그러나 그 낮음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자리입니다.

 

쉰 연 (153~160절) — 나의 송사를 살펴 나를 건지소서

쉰 연은 구원을 향한 간구로 가득합니다. 153절, "나의 고난을 살펴보시고 나를 건지소서." 154절, "나의 송사를 변호하시고 나를 구원하소서." 155절, "구원이 악인들에게서 멀리 있음은 그들이 주의 율례들을 구하지 아니함이니이다." 세 절이 연속해서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구원을 요청하는 근거가 눈에 띕니다. 153절 하반절, "나는 주의 율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말씀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재물도, 능력도, 인맥도 아닙니다. 칼빈은 이것을 "말씀에 머문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근거"라고 해설합니다.

156절, "야훼여 주의 긍휼이 크시오니 주의 규례들을 따라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רַחֲמֶיךָ (라하메카), '긍휼·자궁'. 이 단어의 어근은 자궁을 뜻하는 רֶחֶם (레헴)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향해 품는 가장 본능적이고 끊을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긍휼이 어머니의 본능적 사랑처럼 크다는 것을 근거로 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톰 라이트는 이 단어가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가장 친밀한 언어 중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160절로 쉰 연이 마무리됩니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주의 의로운 모든 규례들은 영원하리이다." רֹאשׁ (로쉬), '머리·시작·총합'. 말씀의 총합, 핵심이 진리라는 선언입니다. 개별 규례들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본질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을 "말씀의 세부 사항이 아니라 말씀의 영이 진리"라는 의미로 읽으며, 예수님이 "내가 곧 진리"(요한복음 14:6)라고 하신 것과 연결합니다.

페 연 (161~168절) — 큰 탈취물을 얻은 것 같이

161절은 4부의 어두운 분위기를 이어받습니다. "고관들이 까닭 없이 나를 박해하였사오나 내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박해는 계속됩니다. 해결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162절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환합니다. "나는 주의 말씀을 기뻐하되 큰 탈취물을 얻은 것같이 하나이다." שָׁלָל (샬랄), '전리품·노획물'.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이 적의 것을 빼앗아 가지는 그 기쁨입니다. 박해받는 자의 입에서 이런 언어가 나온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이것을 "고난이 말씀의 가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빼앗길 위기에 처해본 사람이 그것의 가치를 압니다.

163~165절은 미움과 사랑의 대비로 구성됩니다. 거짓을 미워하고 율법을 사랑하며,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화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165절의 שָׁלוֹם (샬롬)은 단순한 평온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모든 관계가 바르게 회복된 온전한 상태를 뜻합니다. 매튜 헨리는 "말씀을 사랑하는 자의 평화는 상황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빼앗기지 않는다"고 해설합니다.

168절,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시인은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시선 앞에 열려 있음을 압니다. 숨겨진 것이 없습니다. 그 투명함이 불안이 아니라 평안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노출된 삶, 그것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삶이라는 역설입니다.

타우 연 (169~176절) — 나는 잃은 양 같이 방황하였사오니

마지막 연입니다. 타우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마지막 글자입니다. 알렙에서 시작한 이 긴 여정이 타우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시인이 176절에 걸친 여정 끝에 도달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보면, 처음 기대와 다릅니다.

169~170절은 간구로 시작합니다. "야훼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깨닫게 하소서. 나의 간구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 F.F. 브루스는 타우 연 전체가 앞선 모든 연의 요약이라고 분석합니다. 깨달음을 구하고, 구원을 구하고, 찬양을 약속하고, 도움을 구하고, 말씀을 사모합니다. 119편 전체에서 반복되어 온 모든 주제가 마지막 여덟 절에 압축됩니다.

171~172절에서 드디어 찬양이 터집니다. "주께서 주의 율례들을 가르치시므로 내 입술이 찬양을 발하며 주의 모든 계명들은 의로우므로 내 혀가 주의 말씀을 노래하리이다." 176절에 달하는 이 시에서 이렇게 직접적인 찬양의 언어가 나오는 것은 드뭅니다. 시인은 대부분 간구하고 고백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에 이르러 찬양이 나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것을 "참된 찬양은 고난의 용광로를 통과한 후에 더 순수해진다"고 표현했습니다.

173~175절은 마지막 간구들입니다. 손으로 도와달라고, 구원해 달라고, 규례로 도와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175절,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러면 주를 찬송하겠나이다." 살아있음의 목적이 찬송이라는 고백입니다. 존 칼빈은 이 구절을 "시인이 구원을 구하는 이유가 자기 보존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한다"고 해설합니다. 삶의 목적이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그리고 176절. 176절에 걸친 이 장대한 시의 마지막 절입니다.

"나는 잃은 양 같이 방황하였사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תָּעִיתִי (타이티), '방황하다·길을 잃다'. 목자 없이 헤매는 양의 이미지입니다. 176절에 걸쳐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노래하고, 말씀을 지키겠다고 수없이 고백한 시인이, 맨 마지막 절에서 자신을 잃은 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존 스토트는 이것을 "말씀을 가장 깊이 아는 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가장 정직하게 안다"고 해설합니다. 말씀 앞에 오래 서 있을수록 자신이 얼마나 자주 길을 잃는지를 더 선명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고백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주의 종을 찾으소서"라는 간청과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방황하였지만, 말씀을 잊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방황과 기억이 공존합니다. 매튜 헨리는 이것을 "완전한 순종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신앙의 증거"라고 읽습니다. 시인은 완벽하게 말씀을 지킨 사람으로 이 시를 끝내지 않습니다. 방황하면서도 말씀을 잊지 않은 사람, 그래서 목자를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으로 끝납니다.

톰 라이트는 이 마지막 절이 119편 전체를 새롭게 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176절에 걸친 이 시는 완성된 경건의 기록이 아닙니다. 방황하면서도 돌아오는 사람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 결말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15장에서 하신 비유와 정확히 겹칩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 그분이 이 시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시인이 "나를 찾으소서"라고 할 때,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찾아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5부를 한 흐름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쉰에서 긍휼을 근거로 구원을 간청하고, 페에서 고난 속에서도 전리품을 얻은 것 같은 기쁨으로 말씀을 노래하고, 타우에서 마침내 찬양이 터지지만 동시에 자신이 잃은 양임을 고백하며 목자를 찾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올라가는 것 같지만 동시에 내려가고, 강해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더 깊이 의존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의 역설입니다.

176절에 걸친 시편 119편 전체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알렙에서 "복 있는 자"를 선언하며 시작한 시인은, 타우에서 "나는 잃은 양"이라고 고백하며 마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패배가 아닙니다. 자신을 찾아오실 목자를 신뢰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되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방황하되 포기하지 않고, 탄식하되 찬양을 잃지 않는 것. 그것이 시편 119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의 얼굴입니다.

오늘 이 말씀과 함께 이 질문을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방황 속에서도 내가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자이신 그분이 오늘도 나를 찾고 계신다는 사실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